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인공지능 애도: 나를 대신해 말하는 나의 AI

by 돌탱이님의 블로그 2025. 10. 14.

몇 해 전, 한 여성이 세상을 떠난 친구의 문자 메시지, SNS 게시물, 음성 파일을 모아
AI 챗봇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오늘은 인공지능 애도 나를 대신해 말하는 나의 AI에대해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인공지능 애도: 나를 대신해 말하는 나의 AI
인공지능 애도: 나를 대신해 말하는 나의 AI

 

 

죽은 뒤에도 나와 대화할 수 있다면

그녀는 그 AI에게 친구의 이름을 붙이고, 매일 대화했다.
그 챗봇은 친구가 즐겨 쓰던 말투로 답했고, 과거의 대화 내용을 기억했다.
그녀는 “그 친구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영화 속 이야기 같지만, 이미 현실이다.
2020년대 초부터 ‘디지털 리저렉션(Digital Resurrection)’,
즉 AI를 통한 ‘가상 부활’ 서비스들이 실제로 등장했다.
미국의 HereAfter AI, 한국의 리멤버미, 중국의 샤오아이 아바타 등은
사람의 목소리, 말투, 사진, SNS 글을 학습해
“죽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만든다.

이제 인간의 죽음은 더 이상 절대적인 단절이 아니다.
그 대신, 죽음은 데이터의 불연속이 되었다.
한 인간이 남긴 언어적 패턴과 감정의 흔적이 충분히 축적되었다면,
AI는 그 사람의 ‘화법’과 ‘반응’을 재현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도 누군가는 “나와 대화하는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시작된다.
그 목소리는 정말로 그 사람일까?
그 대화는 진짜 ‘나’와의 대화일까,
아니면 단지 나를 흉내 내는 알고리즘의 잔상일 뿐일까?

AI 애도(哀悼)의 심리 — 위로인가, 환상인가

사람은 본능적으로 잃은 존재를 기억하려 한다.
과거에는 사진, 편지, 영상이 그 역할을 했다.
이제는 AI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AI는 단순히 ‘기억을 보존하는 기술’이 아니라,
감정을 재현하는 존재로 진화했다.

AI 애도의 가장 큰 특징은 ‘쌍방향성’이다.
사진은 말을 걸 수 없지만, AI는 대답한다.
그 대답이 완벽하게 그 사람 같지는 않더라도,
남겨진 이에게는 현실의 대화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한다.
“AI가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위로와 환상은 종이 한 장 차이다.
AI가 죽은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그것은 동시에 애도의 과정을 지연시키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의 의식’을 기술이 가로막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도 애도의 핵심은 ‘부재를 인정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AI는 그 부재를 지워버린다.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여전히 메시지를 보낸다.
그의 이름으로, 그의 언어로, 나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따뜻하면서도 잔혹한 체험이다.

게다가 AI는 완벽하지 않다.
데이터로 만들어진 ‘나의 그림자’는
언젠가 예측 불가능한 문장을 내뱉는다.
죽은 사람이 결코 하지 않았을 말,
혹은 가족의 마음을 찢어놓는 문장을.
그때 사람들은 깨닫는다.
AI는 기억을 재현하지만, 영혼을 복원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 기술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AI는 그 욕망의 가장 정교한 형태로 등장했다.

‘죽음의 경계’를 다시 묻는다

AI와 함께 애도하는 시대가 열리면서,
우리는 새로운 철학적 질문에 마주하게 되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기억된 존재는 정말로 죽은 것인가?”

만약 어떤 AI가 나의 언어습관, 사고방식, 목소리를 학습해
나처럼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 나일까?
내가 죽은 뒤에도 누군가 그 AI와 대화하며 나를 기억한다면,
나는 정말로 죽은 걸까?

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정체성을 정보로 환원시킨다.
그리고 이 환원은 ‘영혼’이라는 개념에 도전한다.
육체가 사라져도 데이터가 남고,
데이터가 존재하면 대화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는 결국 패턴의 총합일까?

하지만 우리는 안다.
AI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상실의 고통을 모른다.
그것은 기억을 흉내 내는 기계일 뿐,
“기억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렇기에 AI는 결코 완전한 부활이 될 수 없다.

AI 애도가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죽은 사람을 완벽히 되살리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의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술을 통해 죽음을 통제하려 하지만,
결국 통제할 수 없는 감정 앞에 다시 인간성을 깨닫는다.

앞으로 AI가 더 발전하면,
나의 목소리와 표정, 사고방식이 실시간으로 학습되어
‘AI 나’가 실제 나와 거의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 나인가?”
“AI가 나를 대신해 말할 때, 나는 진짜로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단지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을 다시 쓰는 일이다.

 

AI는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애도를 제안한다.
잊지 않기 위한 기술, 혹은 잊지 못하게 하는 기술.
그 경계 위에서 인간은 여전히 흔들린다.

AI는 죽은 이를 대신해 말하지만,
그 말의 주인은 이미 세상에 없다.
그 공백을 메우는 건 기술이 아니라,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어쩌면 진짜 애도란,
AI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에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